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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사람은 정말 천성적으로 선한가?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안난다. 다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말...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사단지설을 들었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이에 대해서는 납득이 간다. 그래 맹자가 얘기 했듯이 우물가에 아이가 빠지려 하면 내 일이 아닌데도 또한 얘가 빠져 죽어도 나에겐 아무런 피해가 오지 않지만 그 아이가 걱정되고 도우려 한다.

 

사람이라면...

 

그에 대해서는 동의 하지만 오늘 시계태엽 오렌지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한 사람이 매우 밉다. 인간의 마음에 있는 어떤 개체에 대한 분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한다 죽도록 밉다고... 이러한 상황에 속으로 인간은 그 사람을 때리거나 심지어 죽이거나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기만족을 얻는 인간은 과연 선한가? 이러한 상황이 발생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선해서인가? 단지 그 뒤에 올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닌가?

 

만약 완전 범죄가 될 상황이 발생되면 그리고 절대 후에 걸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든다면 인간은 범죄를 저지를까?

 

내 생각은 저지를 것이다. 그 일이 어떠한 것이든 자기에게 도움이 된다면 위의 상황에서 인간은 죄를 짓는다.

 

그러면 인간은 천성적으로 악한가?

 

그럼 맨 처음 얘기했던 사단지설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인간의 마음에 인, 의. 예, 지 가 있다 하더라도 그 위에 이기심이 더 큰 것이 아닐지?

 

즉 자기에게 해도 득도 없는 상황에 인간은 만물선을 위해 움직이지만 자기에게 해나 득이 되는 상황에서는 자기의 이득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것이 인간인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동물과 다르게 만물선을 추구하는 행동은 단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집단 생활하는 동물들에게서 쉽게 보이는 집단을 위한 유전적인 본능일까?

 

그렇다면 또한 자기 희생을 하는 인간은? 이는 교육에 의해  인간의 본성이 왜곡되고 변형되어 나타나는 현상인 것인가?

 

교육을 한 번도 받지 않아 야수와 같은 정글북의 모글리는 인간의 본성이 나타나는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봐야 하나?

 

맹자가 예로 든 인, 의, 예, 지 가 나타나는 인간은 벌써 교육을 받아 본성이 왜곡된 인간에 대한 얘기 인가?

 

교육을 받아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것을 위에 말한 것 처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왜곡으로 봐야 하나?